영원한사랑

사회생활이든, 야구든, '조성민' 이름으로 사는 게 어렵다

 -예상 밖으로 사무실이 아담한데.

 ▶보증금 700만원에 월세 70만원짜립니다. 이 근처에선 많이 싸게 구한 편이죠. 저까지 직원이 3명이었는데 최근에 두명으로 줄었습니다.

 -2007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사업해보니 선수 때와 무엇이 다른가.

 ▶선수 시절엔 나 스스로만 관리하면 됐습니다. 사회생활은 직원도 관리하고 거래처 관리, 대인관계 등 신경 쓸게 많더라구요. 다른 무엇보다, 대한민국에서 조성민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걸요.

 -혹시라도 복귀의 꿈을 갖고 있는가.

 ▶선수로는 전혀 아닙니다. 은퇴하고 운동을 쉬니까 근육이 풀리면서 어깨가 더 아프더라구요. 처음 3개월 동안은 오른쪽 팔을 들어올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지도자나 야구 행정 쪽으론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지만.

 -2008년에 방송 해설위원이었는데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은 이유는.

 ▶애들 엄마(고 최진실) 일과는 무관하게 그냥 작년에 계약 만료 시점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뒀습니다. 제 친구가 모 방송사에서 근무하는데 얼마전에 제 얘기가 나오니 그쪽 상사가 "조성민이는 이제 좀 잠잠해졌나?"라고 되묻더랍니다. 사회생활이든, 야구든, 조성민이란 이름을 갖고 사는 게 참 힘들다는 느낌이 또 들었습니다.

 -현재 사업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이미 예전에도 제빵사업을 했다가 폭삭 망하지 않았었나.

 ▶주변 사람들이 도전 정신 하나는 강하다고 말해줍니다.(웃음) 작년 9월에 'SMC21 스포테인먼트'란 회사를 차렸습니다. 야구장을 지어서 임대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여러 문제로 1년째 땅만 보고 다니고 있죠. 에이전트 업무도 포함돼 있구요. 아직까지 계약한 선수는 없습니다. 또 '먹음직닷컴'이란 식품 온라인 쇼핑몰도 운영중입니다.

 -지난 시즌 도중에 김태균의 에이전트가 되려 한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태균이와 (이)범호 모두 접촉을 하긴 했습니다. 태균이 아버지에게도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모두 4명 정도가 태균이 에이전트라고 말하며 다녔습니다. 그래서 태균이 아버지께 '제가 아니라도 좋으니 어떤 에이전트든 빨리 계약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에이전트들도 사기꾼 소리 안듣고 태균이도 욕 안 먹게 됩니다'라고 조언을 해드렸죠. 나중에 다른 에이전트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일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 진출하려는 선수들에겐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김태균 이범호의 성공 가능성을 짚어본다면.

 ▶태균이는 배팅으로만 보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균이에 대한 일본측 선호도가 그다지 없었을 때 한신쪽에 먼저 얘기를 꺼낸 것도 저였구요. 퍼시픽리그를 간 것도 잘 된 겁니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으니 기회가 많을 겁니다. 냉정히 말하면 범호는 약점이 많은 스윙이라서 일본에서 약간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 주력투수들을 연구하면서 많은 연구를 해야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야구할 때 김인식 감독 밑에 있었다. 최근 그도 야인으로 돌아갔는데.

 ▶지난 번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서울 오시면 시간 좀 내주세요'라고 했더니 '나 맨날 서울 나가' 하면서 웃으시더군요. 유니폼을 벗으셔도 워낙 바쁘시니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할 기회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짧았지만 한국프로야구에서 뛴 동안 가장 기억나는 지도자는 역시 김인식 감독님이죠.

 -요미우리에서 통산 성적을 기억하는지. 좋았던 기억이 없는 팀 아닌가.

 ▶(정색을 하며) 왜요? 그때가 제 야구인생의 봄날이었는데요. 한화도 짧았지만 애착이 있듯이, 내가 몸담았던 요미우리는 프로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보냈던 곳입니다. 통산 11승10패 11세이브 방어율 2.86. 성적 참 초라하죠? 그리고 사십몇 타석에 나가서 타율 3할2푼6리.

 -올스타전에서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이 없었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는가.

 ▶계속 일본에 있거나 아니면 미국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본래 목표는 일본에서 성공해서 메이저리그에 가는 것이었으니까요. 일본에 아예 안 갔으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은 안 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미국에 갔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봤습니다.

 -일본 시절의 기억을 더 얘기해본다면.

 ▶98년에 7승 할 때 첫승 빼곤 모두 완투나 완봉이었습니다. 중간계투들이 제가 선발 나가는 날에는 '아, 오늘 쉬는구나' 했으니까요. 그때는 150개씩 던져도 데미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7승후 4연패를 하는데 아깝게 몇번 지면서 슬슬 팔꿈치에 징조가 보였죠. 그리고 올스타전에서 148~149㎞ 정도로 스피드가 원상복귀 되길래 좋다 싶었는데, 그날 마지막 불꽃이 펑하고 터진거죠.

 -한창 좋았을 때 야구선수 조성민의 구질을 설명해본다면.

 ▶직구는 최고 153㎞에 선발로는 평균 144~146㎞, 마무리 때에는 148~149㎞를 던졌습니다. 127~132㎞의 슬라이더, 133~134㎞짜리 싱커와 포크볼도 괜찮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 아주 빠른 공이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국내 야구의 황금학번이라 불린 92학번 출신이다.

 ▶그때 고교마다 모두 에이스 혹은 강타자가 우리 학번에서 한명씩 있었어요. 대전고 정민철, 인천고 최원호, 경북고 최재호, 대구상고 전병호, 경남상고 차명주 곽재성, 광주일고 박재홍, 재홍이는 투수로도 공이 좋았어요. 원주고 안병원, 부산고 염종석, 마산고 최창양, 경기고 손경수 등등. 그때는 상대 학교와 붙는 게 아니라 '휘문고랑 할 때에는 (임)선동이만 쓰러뜨리면 된다'는 식으로 마음 먹고 경기를 치렀습니다.

동기생 찬호 어릴 땐 촌스러웠는데…

 
 
 -역시 동기생 박찬호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공주고 시절에는 오히려 찬호 보다 한해 밑의 노장진이 더 관심을 모았죠. 찬호는, 어릴 때 많이 촌스러웠습니다.(웃음) 노력을 많이 하는 친구였습니다. 우리 동기들이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자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찬호는 어린 나이부터 거의 생계와 관련된 목표, 어떤 피부에 와닿는 목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LA 다저스에 가서 토미 라소다란 감독을 만난 행운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라소다 감독이 아니었다면 계속 기용되면서 위기를 헤쳐나가는 능력을 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박찬호는 여전히 메이저리거로서 활약하고 있는데.

 ▶인생이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찬호는 명성과 부, 그리고 본인의 이름을 만들어 왔습니다. 저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인생을 배웠구요. 아직 젊으니까 꼭 야구가 아니더라도 또 한번의 목표를 갖는다면 저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며칠전, 12월 24일이 고 최진실씨 생일이었다.

 ▶애들 엄마 생일.... 꼭 말하지 않아도 된다면 답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포츠조선에서 며칠 전에 애엄마 산소에 다녀온 기사가 난 걸 봤습니다. 솔직히 가슴이 철렁 했죠. 또 내 얘기가 어떤 식으로든 언급돼 욕먹는 건 아닌가 하구요.

 -작년 10월, 그리고 이후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젠 한발 떨어져서 기억해낼 수 있을까.

 ▶글쎄요. 그때 장례식장에서 자리를 지킨 건 정말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을 잘 보내줘야겠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제가 어떤 오해받을 행동을 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후엔 제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들로 일이 번지고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힘들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문제란 재산권 논란을 얘기하는 것인지.

 ▶제가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이혼할 당시에 재산분할 청구를 했을 겁니다. 같이 살 때에도 애엄마의 재산이 얼마인지, 얼마나 버는 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작년 논란 당시) 사람들이 저라는 사람을 그다지 좋은 이미지가 없으니까, '저 인간은 또 저럴거다'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것도 같고. 저는 정말 손톱만큼도 욕심이 없었습니다.

 -조성민씨를 만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내가 그런 큰일들을 겪으면 사는 게 너무 힘들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쉰다) 왜 안 힘들었겠습니까. 장담하는데, 보통의 사람들은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욕하는 분이나, 격려해주는 분이나, 심지어 가까운 선후배, 친구들도 "(그런 일들을 겪고) 어떻게 사냐"라고 합니다. 내 인생을 안 살아본 그 누구도 제 마음을 모를 겁니다.

 -지난 여름에는 납골묘 훼손 사건도 벌어졌다.

 ▶나중에 CCTV 화면으로 범행 장면을 봤습니다. '저거 미친 X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소름이 돋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사건 이후 저도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적극 나서서 어떤 얘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괜한 비난을 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심정을 다른 누가 알까요.

 -두 아이와 즐겁게 지내는 모습이 몇달전 여성 월간지에 사진으로 실린 적이 있다.

 ▶나도 모를 때 와서 찍어갔더라구요. 아이들 얘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다른 오해도 생기는 건 원치 않습니다.

 -고 최진실씨에게 이제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잠시 침묵을 지키다) 저는 다 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3일간 있으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해줬습니다. 옛날에 못했던 말들을, 해야 했을 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장례식장에서 마음 속으로 다 했습니다. 지금 다시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