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시작 ‘커튼콜’
커튼콜(Curtain-call)은 무대와 객석이 마지막으로 뜨거운 호흡을 나누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 못내 아쉬워 손을 잡아 끌듯, 커튼 뒤로 사라진 환상의 세계를 한 번 더 불러내는 열렬한 구애(求愛)다.
관객들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면 출연자들은 다시 무대로 나와 감사 인사를 하거나 앙코르 공연으로 화답한다. 몇 번의 커튼콜을 받았느냐는 것은, 그 공연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를 가늠하는 1차적인 잣대가 된다. 이달 초 타계한 파바로티는 지난 1988년 독일에서 열린 오페라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 1시간 7분 동안 박수가 끊이지 않아 165차례의 커튼콜을 받으며 기네스북에 올랐다.
▶‘최고의 찬사’ 혹은 ‘최소한의 예의’
커튼콜은 출연자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모든 것을 허락한다.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 뛰어올라도 된다. 공연 내내 어디서 박수쳐야 할지 몰라 긴장했던 이들 역시 이 때만큼은 원하는대로 박수치고 환호성을 질러도 좋다. 출연자들은 본공연에서 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자유로운 표현도 할 수 있다.
커튼콜은 훌륭한 공연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자 2시간 남짓 수고한 출연자들에게 갖추는 ‘최소한의 예의’로 여겨진다. 출연자 입장에서는, 관객들로부터 자신의 공연을 평가 받는 자리이자 정해진 프로그램 이외에 ‘특별 서비스’를 베풀 수 있는 기회다.
당연히 정해진 횟수나 규칙은 없다. 특히 우리나라 관객은 무대에 관대한 편이어서, 썩 나쁘지 않은 공연일 경우 한 두 번의 커튼콜까지는 예의상 박수를 보내는 편이다. 유형종 음악칼럼니스트는 “유럽의 관객들은 공연에 불만족할 경우 커튼콜은커녕 아유를 퍼붓는 게 예사”라며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유명 연주자일 경우 실망스러워도 적당히 박수쳐주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1913년 프랑스 파리의 샹제리제 극장에서 초연된 스트라빈스키의 무용음악 ‘봄의 제전’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강렬한 리듬과 불협화음 때문에 아유를 넘어서 폭동에 가까운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커튼콜’이 끝나면 또다른 무대가 시작된다
커튼콜은 공연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인데, 클래식 공연의 경우 길이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연주자는 최소 1~2번 이상의 커튼콜과 앙코르를 예상하고 이를 준비해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커튼콜이 끊이지 않으면 즉석에서 앙코르곡을 추가하기도 한다. 연극이나 뮤지컬의 경우 여러 출연자들과 수많은 무대 장치가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클래식 공연에서처럼 무한정 커튼콜을 하기는 어렵다. 대신 몇 번의 커튼콜에 답해 인사를 반복하거나, 공연에서 보여 주지 못했던 화려한 피날레를 펼쳐 보인다.
때로는 커튼콜이 파티나 이벤트로 변신하기도 한다. 지난 8월 31일 국내 대형 뮤지컬 사상 최장기 연속 공연 기록을 세운 ‘라이온 킹’은 커튼콜을 자축 행사 자리로 만들었다. 이날 커튼콜에는 이전까지 최장기 기록을 보유했던 뮤지컬 ‘아이다’의 주역들이 ‘라이온 킹’ 출연진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인사했다.
커튼콜에서는 모든 게 허락되기 때문에 돌발상황도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매력이다. 뜨거운 커튼콜 이후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앙코르를 ‘제2, 제3의 무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주일에 1~2번씩은 꼭 공연장을 찾는다는 클래식 마니아 우현경(28)씨는, 지금도 작년 4월 에프게니 키신의 커튼콜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공연 직후 몇 달간은 그 순간만 계속 생각났다고 한다.
“정말이지 열광의 도가니였어요. 한 명도 빠짐없이 기립박수를 보냈고 어떤 관객은 손수건까지 꺼내서 흔들었죠. 키신은 30번이나 계속되는 커튼콜에 10번의 앙코르로 답했어요. 예상치 못했던 앙코르 연주에 관객들이 점점 더 흥분하면서 나중엔 열기가 제어되지 않을 정도였어요. 앙코르가 연주가 끝난 다음에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사인회가 계속됐죠.”1년여가 지난 지금도 그에게는 키신의 본연주 보다 커튼콜과 앙코르가 더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다. 2시간여의 본연주만으로도 탈진할 만큼 지쳤을 그가, 끝까지 관객들에게 정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키신 말고도 최근에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던 커튼콜로는, 지난 6월 내한했던 74세 노장 타마스 바샤리 피아노 독주회, 32살의 젊은 지휘자 다니엘 하딩이 이끄는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등이 손꼽힌다. 타마스 바샤리는 본공연 1,2부에서 나이 탓인지 명성에 한참 못 미치는 연주를 들려 줬지만, 앙코르로 1시간 가까이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전악장을 연주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공연을 본 사람들은 “앙코르가 아니라 3부 공연을 본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바샤리는 이날의 화끈한 커튼콜 덕분에 다음날 컨티션의 난조를 보여 예정된 연주를 취소하기까지 했다.
한편,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는 커튼콜과 앙코르에 대한 제약이 크다. 커튼콜 한 번에 출연자뿐 아니라 수십명의 스태프가 동시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잡하게 하기보다, 인사할 때 간단한 퍼포먼스를 덧붙이는 아이디어가 많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첫번째 커튼콜에서 지킬의 모습으로 인사한 배우가 두번째 커튼콜 때는 가발을 벗어던지고 하이드의 모습으로 인사를 해 재미난 기억을 남긴다. 뮤지컬 ‘시카고’에서는 여성인줄만 알았던 메리 선샤인이 커튼콜 도중 가발과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여장남자임을 ‘커밍아웃’해 관객을 놀라게 한다.
▶‘커튼콜’에 ‘커튼’이 없다?
모든 ‘커튼콜’에 ‘커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페라나 발레 등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극(劇)’에는 대부분 ‘커튼’이 있다. 육중한 붉은색 벨벳 커튼이 양쪽에서 감싸듯 닫히는 경우도 있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요즘 새로 지은 극장들은 커튼 대신 그냥 평평한 막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연 성격에 따라 사용하는 ‘커튼’이 달라지기 때문에 대극장 무대의 천장에는 항상 여러 개의 커튼이 겹겹이 걸려 있다.
하지만 연극이나 소규모 뮤지컬을 상연하는 중ㆍ소극장에는 아예 ‘커튼’이 없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에게 모든 게 공개돼 신비감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대신 커튼콜 때 출연자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한다거나 거리가 가까워 생생한 호흡이 느껴진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관객들이 알지 못하는 중요한 사실은, 상당수의 ‘커튼콜’이 미리 계산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관객들의 뜨거운 커튼콜에 감동한 출연자가 즉석에서 앙코르 무대를 선사하는 것 같지만, 많은 경우에 계획대로 진행된다. 지난 5월 사라 장과 오르페우스 챔버오케스트라의 연주회 때, 사라 장은 국내 팬들의 열띤 커튼콜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왔다. 눈치 빠른 관객은 사라 장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퇴장할 때에도, 오케스트라 보면대에 올려져 있는 앙코르곡 악보를 발견하고 여유를 부렸다.
김영봉 국립극장 책임무대감독은 “뮤지컬이나 연극의 경우 본 공연 전에 시연회를 열어 몇 번의 커튼콜이 있을지 예상한 다음 스태프들과 예행연습까지 한다”고 했다. 실제 공연에서 예상치 못한 기립박수가 터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준비한 횟수 만큼의 커튼콜을 진행한다. 그렇지 않으면 출연자와 스태프들간 사인이 맞지 않아 혼선이 빚어질 수도 있다.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클래식 공연처럼 수십 번의 커튼콜이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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